도닦는 기분으로 다녀온 여행

때는 2018년 6월, 지금으로부터 약 8년 전이다. 남미에서 스쿠버다이빙을 하고 온 뒤로 다시 할 일이 전혀 없어서 아쉽던 때에 마침 고등학교 동창 L과 연락이 닿았다. 스쿠버다이빙 모임이 있으니 같이 가보면 어떻냐는 얘기를 했고, 나는 처음으로 필리핀 세부에 가게 됐다.

단체 여행은 아니고 세부 현지에서 모임 사람들을 만나기로 해서 비행기는 나랑 L만 같이 타는 일정이었다. 먼저 공항으로 출발한 L이 이제 공항 리무진을 타러가려는 내게 전화했다. 세부에서 사람들이랑 나눠먹을 음식을 준비해가야 한단다. 순대사가려고 했는데 까먹었으니 대신 사오라는 얘기. 가까운 동네 슈퍼랑 편의점에 캐리어를 끌고 돌아봐도 순대는 없어서 그냥 공항으로 갔다.

L은 순대 대신에 — 이거 누가 끓여먹냐고 쿠사리를 먹을 예정인 — 불닭볶음면을 샀다. 탑승 수속을 밟는 중에도 뭐가 정신이 없다. 손이 많이 가는 스타일이었다. 면세점에서 나는 다른 친구에게 부탁받은 면세품을 찾았다. L은 담배도 사랴, 뭐 해야 되는 일이 많았다. 면세 쇼핑도 나의 도움이 필요해보였다. 그럴 수 있지. 손이 많이 갈 수 있지. 그렇게 필리핀 세부 공항에 도착. 입국 심사를 한참 기다리고 나가려는데 첫 번째 일이 생겼다.

나는 세관에 걸렸다. 다른 친구에게 부탁받은 시계가 200달러가 넘어서 돈을 내라는 것. 100달러인가 내라는 세관 직원과 한창 실랑이를 하다가, 첫 세부 여행을 망칠까봐 대충 50달러를 찔러주고 나왔다. 이전에 면세점에서 뭘 사봤어야 알지. 50달러가 아까웠지만 그러려니 했다. L은 자기가 산 면세품은 비행기에서 미리 뜯어뒀단다. 바로 옆자리에 몇 시간을 함께 앉아서 왔는데 나 좀 알려주지 싶었다. 그래도 뭐, 그럴 수 있지. 몰랐던 내 잘못이지. 그렇게 잊어버렸다.

L과 2인 1실을 쓰게 됐다. 이 녀석은 좀 자주, 또 오래 씻는 스타일이었다. 스쿠버다이빙하고 와서 씻고, 마사지받고 와서 씻고, 자기 전에 씻고. 한 번 들어가면 뭘 하는지 한 40분 정도가 걸렸다. 모임 사람들과 정해둔 시간에 몇 번을 늦었다. 나중엔 나혼자 안 씻고 먼저 나가곤 했다. 나는 샤워는 5분도 안 걸린다. 그럴 수 있지. 청결한 타입이로구나.

저녁마다 모임 사람들이랑 숙소 수영장 옆에서 술자리를 가졌다. L이 워낙 자주, 오래 씻으니 모임 사람들이 L이 씻고 나오자마자 들어서 수영장에 빠뜨렸다. 그리고 다시 술 마시러 다들 도망갔다. 수영장에 빠진 L의 모습이 가만보니 좀 이상했다. L은 수영을 전혀 못하는 맥주병이었던 것이다. 스쿠버다이빙은 어떻게 하지. 내가 황급히 들어가서 죽을뻔한 놈을 구했다. 하마터면 놀러왔다가 친구상을 치룰 뻔했다. 손 많이 가네. 고맙단 얘기는 못 들었지만 뭐, 정신없었을테니까.

3박 4일을 보내는 동안 이래저래 서로 영 안 맞았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가는 날, L은 지인들 준다고 마트에서 뭔가 엄청 많이 샀다. 캐리어에 들어가지도 않을만큼. 나는 여행 선물을 잘 안 사는 편이라, 내 캐리어에 넣어줬다. 그럴 수 있지. 인맥이 넓구나. 그렇게 귀국할 시간이 다가왔다.

세부 공항은 들어갈 때 비행기 e티켓을 보여줘야 했다. 여행 전, 나는 스크린샷으로 폰에 넣어가자고 했고, L은 그걸 꼭 종이로 들고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그 얘기는 흐지부지됐었다. 난 여행을 많이 해봤지만, 종이 e티켓만을 받는 경우는 없었다. 그래서 스크린샷 찍은 걸로 잘 말해보려고 생각하면서 공항으로 가는 중이었다. 지들 맘대로 핑계잡아서 돈 뜯어가는 세관 놈들이 꼬투리잡는거 아닌가 내심 불안했다.

공항에 도착해서 입장을 하는 중 L이 갑자기 종이 e티켓을 꺼냈다. 자기 것만 출력해온 것이었다. 혹시 내 꺼는 없냐니까 너는 필요없다고 안 했냐 한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기분이 상했다. 손은 손대로 엄청 가게 한 놈이, 그거 종이 한 장 못 뽑아주는구나. 내가 지 목숨까지 살려줬구만. 결국 e티켓은 필요없었다. 친구랑 공항에서 말다툼을 했다. 대화가 오래가진 않았다. 사실 친구가 잘못한 건 없으니깐. 그럴 수 있지. 그렇지만 우리는 여기까지다라고 생각했다.

그 뒤로 그 녀석과는 연락을 하지 않았다. 본인도 불편했는지 연락이 오지도 않았다. 그 뒤로 지금까지도 스쿠버다이빙 모임에는 나 혼자서 나가고 있다. 이전에 혼자 추억하는 여행에 대한 아쉬움을 적었지만, 이런 경험은 차라리 혼자 떠올리는게 좋을 듯 하다. 이제는 이것도 추억이 됐다. 여행에 대한 좋은 기억만 블로그에 남기려고 했지만, 어쩌다보니 이 때의 일들을 적게 됐다. 적다보니 너무 길어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