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틀 무렵 도착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항구
아주 오래 전 핀란드 교환학생 때의 일이다. 10월 말, 핀란드 학교에서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단체 여행을 갔다. 필수는 아니었다. 비행기 대신 밤새 엄청난 크기의 크루즈 배를 타고 오가는 여행이었다. 스페인 친구 Guille와 2인 1실 객실을 같이 썼다. 기억은 안 나지만 운항 시간이 12시간은 족히 넘었다. 크루즈 내부를 둘러보고도 시간이 남아서 객실에서 술을 한참 마셨다. 잠도 안오고 바람도 쐴 겸 맥주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자정은 이미 지난 시각이었다.
갑판으로 나오니 불을 켜둔 것처럼 달빛으로 환했다. 크루즈 안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은 없다시피 했다. 그런 달빛은 살면서 처음이었다. 황홀했다. 별도 까만 하늘 곳곳에 떠있지만 달빛이 그들을 압도했다. 짙은 흑빛의 바다를 내리쬐며 파도의 모습을 짐작케 했다. 말없이 한참 월광을 바라보다 친구와 달빛에 건배했다. 20대 초반의 청년 둘이 뭘 안다고 인생 얘기까지 나왔던 것 같다.
월광에 비친 선박 실루엣
몇 년이 지나서 나는 한국에서 사회 초년생 직장인으로서 일에 찌든 삶을 살고 있었다. 회사 동료의 권유로 드로잉 클래스를 일요일마다 나갔다. 자유 그림 주제를 정하던 날, 발트해 어디선가 밤을 새워 인생 얘기를 했던 때가 떠올랐다. 똑딱이 카메라로는 절대 담을 수 없던 그 장관을 그리고 싶었다.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목탄과 흰 여백으로 그 날의 밝디 밝은 달빛을 표현했다. 다른 그림을 베껴서 참고하면서 그리느라 크루즈선 대신 커다란 돛대를 가진 배를 그렸다. 배가 다른 것을 빼면 3인칭 시점으로 그렸다고 봐야되나. 달도 너무 크게 그렸군. 나는 저 그림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