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혹시 죽는다면, 내 개가 내 죽은 육신을 볼 수 있게 해주세요.
그들이 내 죽음을 이해하고 슬퍼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어느 날부터 내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버림받았다고 생각할 거예요.

언젠가 이런 느낌의 글을 읽었다. 정확한 원문은 못 찾아서 최대한 기억나는 대로 적어봤다.

영화 ‘오딧세이’를 보고 위 글이 생각났다. 십수년 동안 주인만을 기다린 강아지 아르고스. 늙고 병들어 거름 더미 위에 누워 있는 개. 변장한 오디세우스를 가장 먼저 알아보고 귀를 젖히고 꼬리를 흔들지만 쇠약한 몸으로 일어날 수도 없었다. 주인의 귀향을 확인하고 그제야 숨을 멈췄다. 개를 키우는 반려인들이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을 받았던 장면이라고 한다.

여행을 가거나 해서 레아를 부모님 댁에 맡길 때가 있다. 레아의 아련한 눈빛을 뒤로 하고 집을 나섰다가 며칠이 지나서 돌아오면 레아는 아르고스와 같은 행동을 한다. 귀를 한껏 뒤로 젖히고 꼬리를 흔들며 히융히융 쇳소리를 낸다. 아르고스와의 차이점은 아직 에너지가 넘쳐서 바닥에 벌러덩 뒹군다는 정도. 말을 할 수 없는 동물이지만 그 감정을 나는 느낄 수 있다. 어디 갔다가 이제야 왔냐는 것이다. 몇 시간 정도의 내 부재에 익숙한 레아에게 며칠이란 시간은 너무 긴 것이다. 개의 시간은 사람과 다르니 더욱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아르고스는 거의 평생을 기다렸으니 그 기다림은 영원과 같았을 터.

아빠 기다리는 레아

개들은 기다리는 것에 익숙한 동물이다. 평생 주인만 바라보며 기다리다가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잠을 잔다. 기다림에 익숙하다는 것이 기다림을 좋아한다는 말은 아니다. 턱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로 주인이 올 것 같은 방향에 집중하면서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쉰다. 그래서 레아를 혼자 오래 두거나, 혼자 두지 않더라도 나를 오래 기다리게 만드는 날에는 미안한 마음이다. 혹시 내가 레아보다 먼저 죽게 된다면 레아가 날 기다리지 않으면 좋겠다. 급 유언 마무리 ㅎㅎ